윤동주_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_#8

 

 

 

*BGM

산들 '나의 어릴 이야기'

박보람 '혜화동(혹은 쌍문동)'

 

 

 

너는 떠났다.

 

 

 

바다는 그랬듯 우리 관계의 터닝포인트였다. 너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었고, 너의 할머니는 네가 길을 찾아 떠났다는 말만 남기고 매정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하얀색 돌계단에 주저앉아 위태로운 골목길을 응시했다. 너는 어린 시절에 슈퍼에서 사먹던 레몬 사탕이 기억 날까. 츄파츕스, 롯데 청포도... 이것저것 다 비싸다고 퇴짜를 놓곤 했다. 그리고 슈퍼 할아버지가 팥빙수용 양철통에 넣어둔 싸구려 레몬 사탕을 한움큼 쥐고는 계산대 위에 떨어뜨려 놓았다. 박박 닦아 소중히 다루던 500원을 내고선 너는 제일 먼저 비닐을 안에 레몬 사탕을 넣어주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고갤 숙이고 나온 너와 나는 골목길에 도착하기 전까지 500원짜리 사탕을 모조리 해치우곤 했다. 어느 돈이 없는 날에는, 너는 못되게 주머니 속으로 사탕을 밀어넣곤 했다. 숨을 졸이며 나도 그런 너를 지켜봤다. 살금살금 도둑질하는 괭이마냥 밖으로 걸어나와서는, 할아버지가 보지 못하게 멀리멀리 골목길을 달렸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의 달음박질에선 싸구려 썬크림 냄새와 여름날 지독한 땀냄새가 뒤섞여 여름의 오묘한 향기가 났다. 신발주머니를 휘휘 돌리면서 까르르 웃던 너는 하얀 계단에 와서야 멈춰섰다.

 

 

 

"정윤. 내가 이겼다."

 

 

 

그러면 나는 너를 흘기면서 실내화 주머니로 가볍게 쳤던 같다. 너는, 너는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던 같다. 그리곤 붉은 노을을 향해 걸어가는 뒤통수엘 대고 너는 소리 쳤던 같다.

 

 

 

나는 늦은 사람이 좋아, 윤아.

 

 

 

내가 조금 느긋하게 맞춰 걸을 있어서. 너는 그러고는, 파란 대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럼 나는 원망할 새도 없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때가 서울의 촌동네의 정겨운 밥냄새를 맡으며 나는 남은 길을 걷는다.

 

 

 

하얀 계단은 우리의 이별 장소이지만 동시에 다음 만남의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헤어진 지금, 네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나는 영원한 것을 하나 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역시도 영원하지 않을테니, 우리가 예외인 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나는 느긋하게 기다릴 것이다.

 

 

 

-

 

*BGM

델리스파이스 '고백'

자전거 풍경 '너에게 , 나에게 '

 

 

 

네가 없는 일상은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편안히도 흘러갔다. 벌써 3년째지만, 너는 더는 벨을 울려 나를 울리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까만 가방끈을 다시 고쳐매고 나는 초록빛 신호등을 가로질러 걸었다. 클락슨 소리가 울리는 서울 도심은 지칠 틈조차도 주지 않는다. 나의 꿈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잊게 만든다. 때가 되어 아이 이름 부르던 서울 촌동네도 까맣게 잊게 만든다. 그리고 어디 묻어 없는 진지하고 슬픈 감정마저도.

 

 

 

다만, 나는 생각에 때론 기계같은 걸음을 멈출 있었다. 네가 좋아했던 델리스파이스 노래가 스타벅스에서 흘러나올, 네가 유독 좋아하던 레몬 사탕이 편의점 켠에 비싼 포장지를 두르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을 , 네가 자주 입던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사람을 보았을 ...나는 멈춰서서 너를 떠올렸었다. 나에겐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추억이 이름으로 머리 속에 새겨져 있었나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으레 너를 떠올리고 다시 길을 간다. 마음 속으로 네게 안부를 전하면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

 

 

 

아이씨.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달려갔다. 누군가는 강남역 출구 앞에서 급하게 가방을 뒤적였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들어 부모를 불렀다. 누군가는 고개를 떨구고 비를 맞았다. 누군가는 편의점에 뛰어들어가 비닐 우산을 사들고뛰었다.

 

 

 

시끄러운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비를 맞았다. 비는 기꺼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여름비는 나를 다시 너가 있었던 날로 돌려보냈다.

 

 

 

 야자를 때면, 나는 턱을 괴고 밖을 지겹게 응시하곤 했다. 자리는 바로 창가 옆이었고, 너는 바로 앞자리였다. 어렸을 때와 다르게 너는 키가 훌쩍 컸고, 나는 가끔 칠판이 보이지 않을 때면 모나미 펜으로 등을 쿡쿡 찌르곤 했다. 너는 기꺼이 그럴 때마다 고개를 숙여주곤 했다. 포기는 배추 세는 단위라던 썰렁한 농담을 늘어놓던 국어쌤은 체크무늬 셔츠와 가죽 허리띠를 하곤 했는데, 너는 국어쌤은 같은 옷을 일주일에 4번은 입었다는 것을 알아내 내게 속삭였다. 나는 웃었다. 그날, 우리는 벌점을 받아 청소를 해야했다. 국어는 손엔 효자손같이 생긴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야자 시간에 잠든 애들의 등을 쿡쿡 찌르곤 했었다. 야자는 너희가 대학을 붙기 직전까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던 국어는 특히 야자시간에 깐깐하게 굴었다. 아이들의 일생일대의 목표는 야자를 째는 것이었다.

 

 

 

7월달. 날엔 오늘처럼 예고없이 비가 내렸다. 교실에는 습한 기운이 돌았다. 창문에 덧댄 철봉에는 젖은 양말들이 널렸다. 냄새. 누가 들어오면서 코를 틀어막았다. 에어컨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창문을 열어놓아야 했던 그때, 나는 수업이 끝나고 네게 mp3 플레이어를 빌렸었다. 겨우 2곡밖에 없던 플레이리스트에 나는 네게 밉지 않은 투정을 부렸다. 너는 알겠다며 웃었지만, 너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는 내일도 2곡밖에 채우지 않을 거라는 것을. mp3 버튼을 꾹꾹 눌렀다. 델리스피아스의 고백.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야자하기가 싫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 등을 쿡쿡 찔렀다. 너는 뒤를 돌았다. 나는 너를 끌어당겨 속삭였다.

 

 

 

"우리 오늘 야자 째자."

 

 

 

너의 눈에도 장난기가 서렸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저도요."

 

 

 

너는 엉거주춤 나를 따라나왔다. 복도를 나란히 걷던 우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결국 나는 복도 한가운데서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 조용히 다녀와! 국어의 목소리에 역시도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국어를 돌아보곤 팔을 붙잡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국어는 나무 막대기를 들고 우리를 쫓는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단 아래로 달렸다.

 

 

 

밖에는 여름비가 내렸다. 멈춰선 손을 잡고 나는 다시 달렸다. 비를 맞은 얼굴은 웃겼다. 너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그때 얼굴도 웃겼나보다. 국어는 나무 막대기를 마구 휘두르면서 우리에게 무어라 소리를 질렀지만, 우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없었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여름비는 시끄럽고, 시원했다. 너는 무어라 소리를 쳤다. 나는 웃었다.

 

 

 

지금도 나는 설렌다.

 

 

 

예정되지 않은 여름비는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줬다.

 

 

 

"정윤아."

 

 

 

지금 앞에 나타난 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