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_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2
* BGM
I saw the Devil Piano-모그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모그
우우웅-
벨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기억은 파동과도 같아서, 작은 자극에도 금세 조약돌을 받쳐들은 바다 마냥 흐려진다. 나를 잡아 가두던 기억의 철장이 산호초처럼 흐물해지면서 바닷소리에 시끄러운 소리들이 불쾌하게 침범한다. 눈을 깜박인다. 신경질적인 사이렌 소리, 점점 빨라지는 신호등 소리, 나를 스쳐가는 모든 소리, 목소리. 세어 보면 오천만 개가 넘는 소리 중에 너의 소리는 단 하나도 없다.
멈춰선 나를 둘러싼 한 평의 땅은 그 바다의 모래알이다. 단 한 걸음이면 아스팔트다. 현실과 꿈은 딱 한 걸음 차이였다. 마음이 붙들기 때문에 꿈이 광활하다 느끼지만, 꿈에서 겨우 눈꺼풀을 까뒤집는 순간 삭막한 아파트의 콘크리트 백색 천장을 마주하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평의 모래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모래알이 누군가의 발에 채인다. 서너명의 무신경한 발에 채이면서, 모래알 땅은 금세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젠 어디가 꿈의 자리였는지도 기억이 가물하다. 바다에서의 벅찬 기분도 휘휘 저은 음료처럼 맥빠지게 흐려졌다.
무채색이었다.
바다에 다녀온 이후, 우리는 서로를 찾지 않았다. 우린 그게 마치 규율이라도 되는 양, 바쁨을 핑계로 서로를 울리지 않았다. 감성은 관성과도 같아서, 나의 마음은 너에게로 곱지 못하게 기울었다.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말에도 서운함과 서러움이 섞여나올까봐, 나는 깜박거리는 휴대폰 화면을 몇번이고 켰다가 껐다. 탁. 타탁. 탁. 그 깜박거림이 선없는 모스부호처럼 네게 닿길 바랬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 네가 특별해서이다. 너는 내게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하기에, 특별한 너만이 나에게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정윤이요.
정윤? 그럼 성은 뭐야?
성이 정이고, 이름이 윤이요.
외자야?
늘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세 글자의 세상에서 두 글자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것만 같은지, 그들은 자꾸 뒤를 돌아 나를 곱씹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 그것은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재앙이었다. 반 아이들 이름을 석 달이 넘도록 외우질 못했던 역사 김 선생님도, 첫날부터 출석부의 내 이름은 외웠다. 정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의 이름 한 자씩을 전부 빼앗아오는 것은 어떨까. 그들은 전부 나처럼 한 자의 이름을 가지면서 외롭게 살아가버리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지고 살면 어떨까. 그럼에도 나는 서러워졌다. 그러면 또 나만 이름이 두 자가 아니게 된다. 나는 또 혼자가 된다.
- 정윤? 난 이름이 세글자야.
- .....
- 성까지 다 합치면 네글자인데. 네가 하나 가져가. 뭐 가져갈래?
너는 나보다 하나 더 많았고, 나는 하나가 모자랐다. 그래서 네가 정이 많았던가. 너는 넘치는 이름을 내게 건넸다. 윤의 옆에 기꺼이 너를 내어주어서, 우리는 그제서야 평범해졌다. 윤 옆에 주저앉은 하나의 너. 그건 너를 대신해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도로 한복판에 비둘기가 내려앉았다. 지쳤는지 천천히 고개를 꾸벅거리며 도로 주변을 맴돌던 비둘기는 이내 무겁게 굴러가는 고철덩어리에 저항없이 눌렸다. 어머. 누군가의 감정없는 감탄사가 소음을 갈랐다. 무감정. 그것이 새가 이승에서 영위할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이었다. 문득 나는 서러워졌다. 나의 죽음에 대한 무감정은 아스팔트에 깔려 온 몸이 짓뭉개지는 것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비둘기는 다행히, 무감정한 말을 결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애절한 만가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겠지.
나는 그날 바다의 갈매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원히 하늘을 자유로이 항해하며 하늘을 우러를 것만 같았던 갈매기는 죽음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둔치도 향하지 못한 채, 바다에 추락해 묻혔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진 비둘기는 쓰레기통을 뒤질 것만 같은 지겨운 영원을 오늘, 끝냈다.
그렇다면 영원은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그날 바다에서의 너의 영원을 향한 바람은 비둘기의 것인가, 아니면 갈매기의 것인가. 나는 영원히 답을 알고 싶지 않다. 너를 만나면, 영원을 피하던 나는 결국 영원을 맞닥뜨리고, 그의 발치에서 어느 방식으로든 애걸할 것만 같았다. 난 네가 있다면 수많은 선택지 중에 고민없이 영원을 택하고 싶으니.
그때 전화벨이 또 울렸다.
부르르 떨던 휴대폰에 떠 있는 이름을 보았다.
네 글자의 이름이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